순교자 주기철목사님 3편

    운영자 2022-01-15 21:34 조회수 아이콘 579

    3. 죽음을 각오한 신앙

    설교를 들은 일본경찰들은 목사님의 각오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목사님을 다시 체포하여 데리고 갔어요. 한편 일본경찰들은 목사님이 잡혀간 사이에 다른 평양노회 소속의 목사님들을 협박하여 신사참배에 복종하게 하고 같은 편이 되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목사님들을 조종하여 주기철 목사님을 강제로 파면(목사를 못하게 함)시켜 버렸지요. 급기야 일본경찰들은 배신한 목사님들을 앞세워 산정현교회에 찾아왔고 교회를 지키려는 성도들을 마구 때리고 몸싸움을 벌였어요. 이렇게 해서 교회 문을 강제로 닫아버렸고 목사관에 있던 목사님 가족들은 길거리로 쫓겨났어요.


    그 후 목사님이 잠시 풀려나기도 했으나 교회가 없어도 어디에서든 변함없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다시 감옥에 잡혀갔어요. 목사님의 가족들은 밥을 굶으며 집이 없이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고 이 사실을 안 성도들은 가족들을 돕기로 했어요. 성도들은 일본경찰들의 눈을 피해 먹을 것을 마당으로 던져주었고 목사님 가족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받아먹었듯이 감사하며 생명을 유지했어요.

    하지만 일본경찰들은 나날이 더 잔인해졌어요. 어느 날은 목사님의 어머니와 아내, 어린 아들을 오라고 해서 목사님이 계신 경찰서의 지하 감옥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는 유리창 너머로 목사님이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게 했지요. 애원하는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어요. 그동안 함께했던 4명의 목사님들은 이 일로 모두 포기하고 항복했어요. 그러나 사모님은 목사님의 고문 장면을 보고도 엎드려 기도만 ,이번에는 사모님을 고문하자 목사님이 기도를 했어요. 이때의 충격으로 주기철목사님의 어머니는 실성(정신이 나감)하셨고 어린 아들은 실어증(말을 못하는 증세)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어요.



    1941년 8월에 일본경찰들은 전국에 남아있는 36명의 신사참배자들을 평양으로 데려와 마지막 장소인 평양형무소에 가두었어요. 주기철 목사님도 그곳으로 옮겨졌지만 함께 힘든 시간을 버텨낼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힘든 감옥이었지만 나쁜 일로 잡혀온 북한군들까지도 목사님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어요. 그러나 모진 고문으로 인해 점점 쇠약해진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 해방되기 1년여 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면 꼭 한국교회를 살려달라고 간청할 것이오. 이 말을 우리 교회 신자들에게 꼭 전해주기 바라오...”



    돌아가시던 날 목사님은 사모님을 불러 이렇게 얘기했고 성도들은 목사님을 함께 보내드리며 더욱 기도하며 신앙을 단단히 했어요. 주기철 목사님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나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해 봐요. 그리고 전도하는 일도 멈추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요.


    글, 그림 : 박수예(사이트 운영자)


    참고서적

    주기철 / 오병학 지음 / 규장 신앙위인 북스 개정판2007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 장하림, 주광조 원작 / 대성닷컴2007

    네이버 캐스트/ 신사참배 거부 항쟁에 목숨을 바치다 / 글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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